글/OC

[밀랍] 210907

muscarine 2021. 9. 7. 18:25

* 양꼬치 지부장님 썰풀었던거 짧게 정리
* 상해 묘사 있음




칠이 벗겨진 조각상, 낡아빠진 종, 죽지 못해 가지를 뻗은 나무와 그 가지에서 흩날리는 색바랜 나뭇잎들. 지금이야 이렇게 허허벌판이지만 언젠가 과거엔 수많은 신도로 북적거렸을 성당 앞뜰을 가로질렀다. 기다리라고 해 놓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으러. ‘그래 덤덤히 가 놓고여태 연락이 없는게 말이 되나?’ 하기사 정신이 없을 수도 있지, 그렇게 여겼다. 어지간한 일로는 추가 인력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니까 또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겠지. 기왕 할 거 하나라도 손이 늘면 편할텐데. 부르지 않고.

성당에 잠복한 FH 관계자를 찾는게 오늘의 임무였다. 여럿이 가 봤자 시끄럽기만 하다며 혼자 들어간 사람이 여태 나오지 않는게 문제였다. 가능하면 생포해오라는 윗선의 명령이 있었지. 어디 묶어놓고 마저 조사라도 하고 있는 걸까. 어깨를 으쓱하며 층고가 높은 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아마 건물 꼭대기층의 미사실로 간다고 했던 것 같던 기억을 되짚으며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걱정한게 무색하게 꼭대기 층에 다다를 때까지 쥐새끼 하나 나오지 않았음에 긴장하던 마음을 놓고, 굳게 닫힌 미사실 문을 힘주어 열기 전 까진 괜찮았다.

해는 중천이었고 미사실 안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색색깔 빛으로 가득했다. 출입문이 붙은 쪽을 제외하곤 삼면이 유리로 세워진 화려한 내부였다. 곳곳에 놓인 기물들은 오래되긴 했으나 한창 쓰일 당시의 품격이 느껴졌으며, 천사의 오르간 소리마저 들리는 듯한. 성당에 방문한 신도들의 기도가 가장 강하게 모였을 장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갖가지 색의 빛이 내리 꽂히는 장소. 조각상 아래의 제단.

츠유리 카게하는 그 곳에 있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여러 개의 송곳에 몸을 꿰뚫린 채로.

아, 아, 잠시만. 이게 아닌데? 이런 걸 생각하고 온 게 아닌데? 상황이 벌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 길게 뻗은 송곳의 단면을 타고 흐르는 피가 아직 붉었다. 그걸 보면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 있었다. 당장 달려가서 구해야 하는걸 머리론 아는데 마음이 받아들이질 못 해서. 미동없이 멈춘 몸이, 흘러내리다 만 머리카락이 이제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럴리가 없는데.
등을 뚫고 올라온 선단이 무지개 색으로 번지는 걸 보면서도.
우리는 오버드다. 몸 좀 뚫렸기로서니 쉽게 죽는 존재가 아니다.
번지는 무지개 끝이 검붉게 말라붙어 가는 걸 보면서도.
아직 시간은 있다. 저 끔찍한 게 무기물이기만 하다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된다.
검붉게 말라붙은 송곳 가지가 새로운 피로 덮이는 걸 보면서도.
보면서.

똑,
그것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를 들었다.

“지부장, ……!!”

그제야 달려갔다. 얼굴은 진즉 사색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함정이라면? 아직 적이 있을 텐데?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뛰고 뛰어서 살벌하게 뻗은 송곳들을 일단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하게만 보였던 흉기들이 고운 유리가루로 바뀌어 이리저리 흩날린다. 몸을 꿰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미츠루보다 약간 큰 몸이 속절없이 쏟아지고, 그걸 겨우 받아냈다. 큰 숨이 쉬어진건 그 다음이었다. 눈 앞이 핑 돌고 다리가 휘청거렸다는 것도 그제야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이게 숨이 멎는 감각. 쓸데없는 걸 알아 버렸다.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아. 귓가에 맴도는 미약한 숨소리가 카게하의 숨인지, 아니면 자신의 숨인지도 분간이 안 되었다.
어느 쪽이든 살았다. 큰 일이 나기 전에 구했다. 이걸로 다행인거지? 이제 데리고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되잖아. 여기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어. 조심히, 조심히…….

“웃기고 자빠졌다. 그걸로 되겠나.”

그런 마음의 소리를 싸그리 무시했다. 조용히 이를 갈며 창을 등지고 서면 아무도 없는 미사실 내부가 보인다. 그대로, 축 늘어진 카게하의 몸을 어떻게든 받치고 서서 창유리에 가만히 손을 댔다. 넓은 방에 답잖게 내리깐 목소리가 울려퍼진 건 그 다음이었다.

“마,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나오라 안카나.”

조용했다.

“아직 안 가고 여 있는거 다 안다. 뭐 보는데, 구경났나.”

…….

“건물 째로 묻히고 싶으면 그라든가. 아까 내 하는거 몬 봤나? 다 죽자 그거가.”

이건 허세였다. 건물 자체를 잿더미로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질 것 같진 않았다. 그야 이 곳은 ‘특별 무대’나 다름없는 환경이었으니까.

“…….”
“니가.”

다행히 허세가 먹혀 든 모양이었다. 길게 떨어지는 낡은 커튼 뒤에서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이 나온다. 점만가배. 긴장은 했으나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직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제. 픽 웃음이 샜다. 보자마자 한 대 치고 싶을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머리가 식었다. 어떻게해야 저 새끼를 효과적으로 조질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자신을 향해 공격준비를 하는 상대가 어이없을 뿐. 니가, 지금, 뭘 잘했다고. 그걸 생각할 정신머리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마, 니.”

니는 아무껏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그라는 니는 얼마나 잘 아냐며 한 소리 듣고 말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알고 지낸지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으니까. 그치만예, 지부장님.
적어도 지부장님이 이런 꼴을 막 당해가 좋을 사람이 아닌 건 안다고예. 당신을 가볍게 대해가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건 누가 됐든 그라겠지마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마주 노려보는 상대방의 꼬라지가 아주 웃겼다. 어이가 읍네.

“이 사람이. 그마이 막 대해가 될 사람으로 븨드나.”

대답이 없었다. 딱히 뭘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으니까 상관은 없다.

“그래, 계속 말하지 마라. 니 거서 입 뻥긋 잘모하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을거 같으이까. 근데 일단 이짝은 공무원 비슷한기라 막 죽여뿌도 안 되거든.”
“…….”
“내가 뭐 할지 알긋나.”

미츠루의 말과 동시에 상대방이 먼저 움직였다. 아, 역시 이렇게 되나. 짜증나구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짚었던 손이 가볍게 표면을 쓸었다. 파칭, 어딘가의 유리가 깨졌다. 까드득, 키잉, 쩌적, 쩌적, 어디선가 날카로운 가루가 떨어진다. 후두둑, 쨍, 파편이 굴러다니는 소리. 벽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리. 바닥을 흔드는 진동에 상대는 바삐 움직이던 발을 멈췄고,
쩌엉! 오색찬란히 빛나던 유리벽은 눈 깜빡임과 동시에 수십 수백만의 파편이 되었다. 삼면의 유리벽을 한꺼번에 잃은 미사실은 바깥바람이 스산히 드나드는 폐허로 변하고 공중으로 흩뿌려진 미세한 파편들이 적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그 곳이 유리그물이며, 한끗 잘못 쉰 숨으로 들이마시기라도 한다면 몸 내부부터 천천히 망가질 테니까. 이 투명한 결계를 풀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미츠루 뿐이었다.

“…….”

마음만 먹는다면 이 사람이 당한 것과 똑같이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럴 힘은 충분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첫째,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그런 짓을 하기엔 미츠루는 아직 ‘바깥’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둘째, 사실은 이 쪽이 본론일 것이다.

“괜히 니 죽였다가 일 망쳤다고 혼나기 싫거든. 내 쫌 도와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