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220612
뻐근해진 눈을 깜빡이며 멀리 걸려 있는 벽시계를 봤다. 하루가 끝나감을 알리는 짧고 긴 바늘을 보다가 눈을 거둔다. 어지간한 생활은 이 곳 연구소에서 하며 집이래봤자 생필품을 두는 창고 쯤으로 여기는 미노루에게, 출근이며 퇴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시간이 늦었다한들 별 감흥은 없다. 그래도 책상머리에 오래 앉아있긴 했으므로 몸을 움직일 겸 커피를 보충하러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책상 한 켠에 두었던 핸드폰에서 짧은 수신음이 났다. 업무용이 아닌 개인용 연락처로 가까이 지내는 이렇다할 인맥이 없어 보통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었으나 최근엔 울리는 횟수가 늘었다.
그리고 상대는 대개 같은 사람이었다. 확인해보면 이번에도.
“이 쪽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저장은 안 되어 있지만 모르는 번호는 아니다. 니노미야 잇세. 그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일부러 외운건 아닌데……사적으로 연락할 마음이 없어 저장해두지 않았으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저 쪽 성격상 꾸준히 보게 된 바람에 외워졌을 뿐이다. 하지 말라는 말도 귀찮아져 맘대로 하게 놔둔지 좀 되긴 됐다. 늘 오는 메시지도 그의 성격대로 막무가내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그런 잇세가 보낸 오늘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이랬다. ‘언제 들어오냐’.
“…….”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원래 같이 살던 사람처럼 말하네. 사실 몇 번째 받고 있는 메시지지만 역시 적응이 안 된다. 아니지. 저쪽이 너무 적응력 높은거라고.
얼마 전의 얘기다. 대뜸 지낼 곳이 필요하다며 찾아와선 소파에 드러누우려는 잇세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글쎄. 갑자기 집을 못 쓰게 됐다지 뭔가. 그 이상 자세한 얘기는 않고 짐가방을 내려놓는 그를 어이없게 쳐다보다가 ‘길드에선 감찰관 집 하나 지원 안 해줘요? 새 집 구할 돈은 있을거잖아요.’ 따위의 별 감정은 없지만 가시는 있는 말을 했더랬다. 그러자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다는 대답이.
「응, 그치만 여기가 편해.」
「그걸 말이라고.」
경위가 어쨌든 진짜라면 딱한 상황이긴 했다. 그렇다고 나한테 찾아올 이유가 있나. 집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로운 모습이 영 마뜩찮았지만 미노루의 경험상 잇세는 이상한데서 고집이 있었다. 무력행사로 쫓아낼 수도 없으니 (분하지만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타협점을 찾는게 빨랐다.
연구실엔 둘 수 없었다. 냉동수면이라도 시켜 둘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남은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차피 지낼 거라면 여기 말고 제대로 된 집이 낫겠죠.」
「별 상관없긴한데.」
「제가 상관있습니다. 집 알려줄게요. 그 쪽으로 가세요.」
잇세를 아예 자신의 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이 편이 나았다. 피차 불규칙한 생활패턴에 한 공간에서 부대낄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지만 집을 팔아먹는 것만 아니면 뭘 해도 상관없다고도 일러 뒀으니 더이상 귀찮은 일 없이 잇세도 만족할줄 알았다.
그랬는데. 집을 빌려준 뒤로 시간이 늦어지면 가끔 이런 연락이 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미노루에게 집이란 돌아갈 곳 같은게 아니었기에 들어간다는 개념 자체가 옅었다. 독립 전 가족들과 살 때에도 부모님의 관심은 온통 동생에게만 쏠려 있었기 때문에……이런 연락을 받은 건 처음이라 그저 낯설기만 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해두지만 최근 미노루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건 잇세의 체류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필요하면 갈 것이나 그 주기가 끽해야 한 달에 한두번일 뿐이다. 잇세도 이러는 편을 더 좋아할 줄 알았더니 심심하면 부르는 걸 봐선 자신이 틀린 모양이었다. 뭐가 문제야. 크지도 않은 집에서 다 큰 인간 둘이 들어 앉아 있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샐샐 웃는 얼굴로 친해지자니 뭐니 하는 말을 쉽게 건네지만,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아서 미노루는 늘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야 그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죽이고 싶어 하면 모를까.
"……."
이래서야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가운 주머니에 쏙 넣어놓고 커피 머신을 향해 느릿느릿 걷는다. 좀 쉬어야겠어. 금방 커피향기가 번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손님용 낮은 테이블에 내려 놓은 미노루가 그 날 잇세가 했던 것처럼 등을 소파에 쭈욱 기댔다.
* * *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는 몰라도 강해지고 싶다며 미노루를 찾는 사람은 꽤나 많았다. 니노미야 잇세도 그 흔한 케이스 중 하나로, ……어. 처음엔 어땠더라? 힘을 원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패턴이란게 다 비슷비슷하므로 어지간히 특이하지 않고서야 금방 잊혀지는 법이다. 보통은 다짜고짜 고함을 치거나, 비굴하게 나오거나, 담백하게 굴거나 셋 중 하나인데. 역시 기억 안 나. 다만 자신을 쳐다보는 빨간 양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걸 갈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은 느꼈던 것 같다. 정체도 정확히 모르고 적합자도 찾지 못해 한 켠에 넣어두기만 했던 검은 돌을 꺼낸 이유였을테다. 그 뒤는, 뭐.
그게 ‘반쪽짜리’인걸로 판명났을 때 얻어 맞았던게 어렴풋 기억난다. 아예 효과가 없던 건 또 아니었는지, 썩었어도 오버드인 미노루가 죽었다 깰 정도의 통증이었다. 사실 이 쪽으로선 돌의 진위여부를 떠나 열네번째만에 찾아낸 적합자이자 희귀한 샘플을 찾았다는 기대감에 정밀검사부터 해보고 싶었지만……그랬다간 정말 뼈도 못 추릴 것 같아 입다물고 맞아 준거였다.
까맣게 물든 왼쪽 눈-보는 쪽 기준이다-을 응시하면서, 딱히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아도 자신을 죽일듯 찌르는 적의에 대해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늘어난 원수가 한두명도 아니었고.
그 뒤로 다신 안 올 줄 알았지. 결함품-여러 의미로-이라도 겨우 찾은 샘플을 놓친게 아쉽긴 했지만, 그런건 결국 이쪽의 사정이다. 데이터가 미노루 손에 있어봤자 이후 조정이고 뭐고 피험자가 도망쳐 버리면 잡을 방도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잇세가 다시 얼굴을 비춘 건 예상치 못한 일임과 동시에 미노루에겐 뜻밖의 행운이기도 했다.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으나 주먹이 날아왔던 일이 거짓말처럼 새 실험이나 데이터 수집에도 그럭저럭 협력해 주었다. 이해가 안될만큼 친근하게 굴며 귀찮게 하는게 오히려 문제일 정도로. 그러는 사이 이런저런 일이 터지기도……. ……. 난데없이 뜯어먹힌 적도 있었나. 잇세 본인은 기억 못 하는 것 같아도 그 점까지 포함해 흥미로우니 아무래도 좋았다.
회상을 갈무리하고 현재로 되돌아 온다.
두꺼운 안경렌즈 너머 시선이 한 점에 닿았다. 데이터, 꽤 쌓이긴 했네. 책장을 가득 채운 수백개의 파일책 중 ‘DC-0014’ 라벨이 붙은 물건을 여상히 쳐다본다. 다른 것보다 좀 두꺼운가. 그러고보면 UGN에 제출할 용도를 뺀 개인 연구 중에선 이만큼 장기간 관찰한 케이스도 드물었다. 중간에 폭주하거나, 탈출하거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거나, 기타등등……연구를 지속할수 없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니노미야……잇세, 인가.
미노루에겐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한자의 나열이었다. 정리된 개별 인식번호와 함께 쓰인 개체명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으나.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오며 수없이 본, 툭하면 비웃듯 가늘어지는 눈에 대해 생각한다. 싫은가하면 좀 다르다. 정말 싫었다면 제 앞에서 잇세가 무방비해졌던 수십번의 순간을 기회로 얼마든지 ‘처리’ 해버릴 수 있었다. 지난 하트 테이커 사건 때 UGN에 넘겼어도 되었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그럴 마음은 없다.
그럼 좋은가? 웃기는 소리다, 누가 그런 걸.
…….
놓치기엔 아까운 샘플이라고 해 두죠.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말을 툭 뱉어둔다.
* * *
찰칵, 시곗바늘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잔을 만져보면 다행히 커피는 따뜻했다. 오늘은 밤을 샐 예정이었으니 이걸 다 마시고 재개해도 될 것이다.
무심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핸드폰이 손끝에 걸린다. 그러고보니 아까 메시지에 답장 안 했지. 어차피 잇세 멋대로 보내진 문자, 똑같이 멋대로 무시하면 안 되나? 이 사람 그런 거에 연연하던가? 잘 모르겠다. 답장을 기다릴 이의 마음보단 나중에 뒤끝있게 귀찮게 할까 그 쪽이 걱정이었다.
들어가지도 않을 건데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는 게…….
"하아."
핸드폰을 슬그머니 빼들었다. 팝업창으로 확인한 덕분에 읽지 않은 걸로 되어 있는 메시지 옆의 1이 지워진다.
오지랖이 옮았나. 지속된 업무 때문인가. 노곤해진 머리가 평소답지 않은 판단을 내린다.
뭐어……답장한다고 손이 닳는 건 아니니까.
[안 들어갑니다. 남은 일이 많아요.]
[내일은 갈테니 청소 좀 해놓으세요.]
집을 빌려준 입장에서 이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사실 안 시켜도 알아서 하는 것 같았는데 그냥 찔러보고 싶었다.
잔을 호록거리는 얼굴이 아까보다 묘하게 편해 보이는걸 스스로 아는지 모르는지.
내일 저녁은 뭘 먹어야 하나.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